[PEDIEN] 직장을 옮기며 개인형퇴직연금(IRP) 계좌를 하나 받아 든 사람을 떠올려 보자.
쓸 줄을 몰라 은행에 갔더니 '금액 찾고 해지하면 된다'는 안내를 받았다.
그래서 다 찾아 썼다.
한국노동연구원이 올해 진행한 집단심층면접(FGI)에 담긴 실제 이야기다.
적립금 501조원 시대, 한국 퇴직연금의 가장 흔한 결말은 아직도 '일시금으로 찾아 쓰기'다.
정부가 10월 29일 관계부처 합동으로 내놓은 '퇴직연금 기능강화 방안'은 이 결말을 바꾸겠다는 설계다.
축은 둘이다.
모든 사업장이 퇴직금을 회사 밖에 쌓게 하는 사외적립 의무화, 그리고 전문 수탁법인이 돈을 대신 굴리는 기금형 퇴직연금의 도입.
올해 2월 노사정이 처음 맺은 공동선언을 구체화한 것이다.
두 축 모두 해외에 닮은 제도가 있다.
호주의 강제 적립, 영국의 자동가입, 일본의 기업연금.
그런데 그 나라들의 규칙은 저마다 다른 토대 위에 서 있다.
한국이 숫자와 틀을 가져올 때, 그 토대까지 함께 따라오지는 않는다.

2028년부터 사장은 퇴직금을 회사 밖에 쌓아야 한다
지금은 퇴직금을 회사 장부로만 쌓아 두는 사업장이 수두룩하다.
회사가 무너지면 노동자는 밀린 퇴직금을 받지 못한다.
정부 집계로 2025년 체불액 가운데 퇴직금 비중이 41.1%(8,229억원)였다.
사외적립을 의무로 만들면 이 위험을 구조적으로 줄일 수 있다는 게 정부 판단이다.
일정은 이렇다.
연내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 1년의 준비기간을 두고, 2028년 100인 이상 사업장부터 2029년 10~99인, 2030년 10인 미만까지 3단계로 모든 사업장의 사외적립이 의무가 된다.
의무는 각 단계 시행 이후 쌓이는 계속근로기간부터 적용된다.
영세 사업장의 도입률이 바닥이라 이 설계가 필요했다. 5인 미만 사업장 도입률은 10.6%, 300인 이상은 92.1%다.
노동자 가입률은 몇 년째 53% 언저리에서 멈춰 있다.
호주는 1992년부터 떼기 시작해 월급의 12%까지 올렸다
호주는 1992년 슈퍼개런티법으로 사용자가 노동자 통상임금의 일정 비율을 연금에 의무 납입하게 했다.
그 비율은 조금씩 올라 2025년 7월 12%에 도달했다.
법에 예정된 마지막 인상이었다.
즉 호주는 '월급의 12%'라는 숫자를 하루아침에 세운 게 아니라, 30년 넘게 끌어올렸다.
그 밑에는 다른 토대가 깔려 있다.
적립금은 수탁자가 운용하는 신탁(트러스트)에 담기고, 수탁자는 가입자의 최선의 재무이익을 위해 행동할 법적 의무(SIS법)를 진다.
건전성감독청(APRA)이 이들을 감독하고, 스스로 고르지 않는 사람을 위한 기본 상품 '마이슈퍼(MySuper)'가 2013년부터 돌아간다.
그리고 보존(preservation) 규칙.
은퇴연령 전에는 원칙적으로 돈을 뺄 수 없다.
한국도 확정기여형(DC)이면 사용자가 임금총액의 1/12, 약 8.3%를 노동자 계좌에 넣는다.
비율만 보면 호주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그 돈을 회사 밖에 쌓는 일 자체가 의무가 아니었다.
호주가 30여 년에 걸쳐 올린 길을, 한국은 2028~2030년 3단계로 압축해 밟으려 한다.

영국은 '거부하지 않으면 가입'을 깔고, 공공기금을 하나 세웠다
영국은 2012년부터 자동가입(auto-enrolment)을 시행했다. 22세 이상, 연 1만 파운드 이상을 버는 피용자는 일단 자동으로 연금에 가입되고, 원하지 않으면 거부(opt-out)할 수 있다.
최소 적립률은 적격소득(연 6,240~5만270파운드) 구간의 8%, 이 중 사용자 몫이 3%다.
심리적 장벽을 낮추자 거부율은 8% 안팎에 그쳤고, 노동자 연금 가입률은 2012년 55%에서 2024년 88%로 뛰었다.

이 제도가 작동하려면 전제가 하나 필요했다.
모든 사용자가 쓸 수 있는 연금이 있어야 자동가입이 성립한다.
그래서 영국 정부는 공공 신탁형 기금 NEST를 직접 세웠다.
설립 비용은 정부가 빌려줬고(총 12억1,800만 파운드), NEST는 2024/25 회계연도에 처음 흑자를 내며 상환을 시작해 2038년 완납을 예정하고 있다.
자산은 약 500억 파운드까지 불었다.
한국 방안도 같은 장치를 들여온다.
수령 단계에서 일시금 의사를 밝히지 않으면 자동으로 연금 지급(opt-out), 의무화 이후 미도입 사업장은 중소기업퇴직연금기금에 자동가입하되 일정 기간 안에 탈퇴할 권리를 보장한다.
NEST 자리에는 공공기관이 운영하는 중퇴기금(푸른씨앗)이 선다.
방안은 기금형 재무요건을 설명하면서 NEST의 정부 대여·상환 모델을 직접 참고 사례로 들었다.
새로 들여오는 '수탁자책임'은 영미 신탁법에서 자란 말이다
기금형 퇴직연금은 전문성을 가진 제3자 수탁법인이 적립금을 대신 굴리고, 수익과 손실은 가입자에게 돌아가는 구조다.
설립 주체에 따라 금융기관 개방형(영리 주식회사), 연합형(비영리법인), 공공기관 개방형 세 유형으로 나뉜다.
금융기관 개방형은 최소자본금 120억원 등 재무요건을 갖춰 고용노동부 인가를 받아야 한다.
핵심 단어는 수탁자책임이다.
호주와 영국은 수백 년 쌓인 신탁법 전통 위에 이 의무를 얹었다.
한국 법체계에는 그 뿌리가 옅다.
그래서 방안은 충실·주의의무를 법에 새로 규정하고, 운용·이해상충·설명의무 같은 핵심 영역에서는 입증책임을 수탁법인에 전환하며, 적립금의 0.25%를 운영위험준비금으로 의무 적립하게 한다.
토대가 없는 자리에 토대를 법으로 깔아 넣는 작업인 셈이다.
한국안이 해외보다 앞선 지점도 있다.
방안은 일본 AIJ 사건을 교훈으로 삼았다.
AIJ는 10년 넘게 연 10% 수익을 냈다고 허위 보고하다 운용자산 약 2,100억엔의 90%를 날렸다.
한국은 자산보관과 기준가 산출 같은 업무를 의무적으로 외부에 맡겨 교차검증하게 하고, 투자정책 결정은 아예 위탁하지 못하게 해 책임 소재를 수탁법인으로 못박았다.
사고가 터진 뒤 고친 일본과 달리, 안전장치를 먼저 깔고 출발한다.
돈이 빠져나가는 통로가 한국엔 아직 열려 있다
호주는 보존연령 전 인출을 원칙적으로 막는다.
영국은 55세, 2028년 4월부터는 57세가 되기 전에는 손댈 수 없다.
일본 확정기여형도 원칙적으로 60세부터 받는다.
세 나라 모두 '중간에 못 뺀다'가 기본값이다.
한국은 다르다.
중도해지와 중도인출의 문이 열려 있다. 2024년 중도활용 18조원 중 중도해지가 15조원(83.3%)이었고, 중도인출 사유는 주택구입(67.3%)과 임차보증금(23.0%)이 대부분이었다.
일시금 수령 계좌 비중은 여전히 83.5%다.
전세보증금과 집값이라는 한국 특유의 목돈 수요가 이 통로를 떠받친다.
그래서 방안은 통로를 틀어막는 대신 우회로를 낸다.
중도인출 대신 쓰도록 담보대출 상품을 열고(담보제공 한도 50→70% 등), 수령 단계에서는 자동 연금으로 유도한다.
인출을 봉인한 호주·영국과는 접근법이 다르다.
수익률도 숙제다.
퇴직연금의 2025년 수익률 6.47%는 역대 최고치였지만, 같은 해 국민연금 18.82%에는 한참 못 미친다.
기금형은 이 격차를 좁히자는 시도다.
개정안은 11월 중 마련돼 12월 국회 본회의 통과를 목표로 한다.
통과하면 1년 준비기간을 거쳐 2028년 100인 이상 사업장부터 적용된다.
국민연금공단을 기금형에 어떻게 참여시킬지는 노사정과 전문가 사이 이견이 커 국회 논의로 넘어갔다.
남는 질문은 두 가지다.
신탁 전통이 옅은 토양에서 법으로 심은 수탁자책임이 제대로 뿌리내릴 것인가.
중퇴기금은 영국 NEST만큼의 공공 디폴트로 커질 것인가.
취재에 참고한 자료
한국 측 수치는 고용노동부 등 관계부처 합동 '퇴직연금 기능강화 방안'(2026년 10월 29일) 원문에서 옮겼다.
호주 적립률은 호주국세청(ATO) '최종 슈퍼개런티 인상' 안내(2025년 7월 12% 도달)와 호주연금협회(ASFA) 제도 해설(2025년 7월)로, 수탁자 의무·보존 규칙은 ASFA 해설로 확인했다.
영국 자동가입 기준은 영국 연금규제청(TPR) 소득 문턱 자료(2026/27년도 유지)로, 가입률·거부율·NEST 정부 대여(12억1,800만 파운드)와 2038년 상환 계획은 영국 노동연금부(DWP)·NEST 연차보고서(2024~2025) 및 Pensions Age 보도로, 최소수급연령 55→57세(2028년 4월) 상향은 영국 하원도서관 연구브리핑으로 확인했다.
일본 확정기여연금 개정(2025년 6월 13일 성립, 2026년 4월 매칭한도 폐지, 2027년 1월 한도 월 5만5천→6만2천엔)과 60세 수급 원칙은 머서·AON 등 복지컨설팅 자료가 개정법을 인용한 것을 교차 확인했다.
나라마다 기준 소득(한국 임금총액, 호주 통상임금, 영국 구간소득)과 행정 단위가 달라 적립률·가입률의 단순 비교에는 한계가 있다.
편집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