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DIEN] 서울의 한 중견 전자부품 회사가 미국에서 경쟁사의 특허에 발목이 잡혔다고 하자.

회사는 그 특허가 애초에 잘못 등록됐다고 보고, 값비싼 법원 소송 대신 미국 특허청(USPTO) 특허심판원에 특허무효심판(IPR)을 낸다.

전문 심판관이 빠르고 싸게 봐 준다는 계산이다.

그런데 돌아온 답이 '심리를 열지 않겠다'였다.

같은 특허를 두고 이미 연방법원에서 본안 재판이 진행 중이라는 이유다.

회사는 결국 더 느리고 비싼 법정으로 돌아간다.

이런 장면이 요즘 미국에서 부쩍 늘었다.

미국 특허무효심판 개시율은 2024 회계연도 68%에서 2026 회계연도 41%로 떨어졌고, 청구 건수도 같은 기간 1,250건에서 452건으로 64% 줄었다.

지식재산처 특허심판원은 11월 6일 서울 서초구 엘타워에서 '2026 지식재산 심판 국제포럼'을 열고 미국·유럽·중국·일본의 심판제도 변화를 한자리에 올렸다.

참석자 약 150명 앞에 놓인 숫자는 저마다 극적이었다.

다만 그 숫자들은 하늘에서 떨어진 게 아니다.

각 나라의 심판제도는 그 나라의 소송 구조, 출원 관행, 행정 체계라는 토대 위에 서 있고, 최근의 변화도 그 토대가 밀어 올린 결과다.

같은 '68%'라도 미국의 68%와 유럽의 68%는 전혀 다른 뿌리에서 나온다.

한국이 이 숫자들을 참고하려면, 숫자보다 먼저 그 아래 깔린 제도를 봐야 한다.

미국은 '심리를 열지'부터 청장이 고른다

미국 특허무효심판은 2011년 미국발명법(AIA)이 만든 제도다.

이미 등록된 특허의 유효성을, 법원이 아니라 특허청 안의 특허심판원(PTAB)에서 당사자끼리 빠르게 다투게 한 행정 절차다.

핵심은 같은 특허를 법원과 심판원 '두 갈래'에서 동시에 다툴 수 있다는 데 있다.

이 병행 구조가 미국 제도의 토대이자, 최근 변화의 진원이다.

특허법은 청장에게 심판을 '열지 말지' 결정할 재량을 준다.

법원에서 이미 재판이 많이 진행됐으면 심판을 중복으로 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으로, 실무에서는 '핀티브(Fintiv) 요소'라는 기준으로 운용돼 왔다.

지난해 이 빗장이 크게 조여졌다. 2025년 2~3월 미 특허청은 재량 거부를 좁혀 놓았던 2022년 지침을 거둬들이고, 청장이 먼저 '개시 거부' 여부를 가린 뒤 본안 심판부로 넘기는 2단계 절차를 도입했다.

여기에 심판부 업무량과 '권리가 오래 자리 잡았다는 신뢰' 같은 새 잣대까지 더했다.

지난해 9월 상원 인준을 받은 존 스콰이어스 청장 체제에서 이 기조는 이어지고 있다.

결과가 앞의 숫자다.

개시율은 떨어지고 청구는 반 토막 났다.

미 특허청은 2025년 10월 이 거부 기준을 아예 규정으로 못 박는 입법예고까지 내놨는데, 오늘 기준으로 최종 확정 고시는 확인되지 않는다.

지금 작동하는 건 규정이 아니라 지난봄의 내부 지침이다.

지식재산처는 이 변화를 두고 우리 기업이 무효심판 개시 가능성을 면밀히 따지고 법원 소송 등 다른 수단도 함께 고려하는 전략이 필요하다고 짚었다.

한국의 특허심판원에는 '열어줄지'를 심판원장이 고르는 이런 재량이 없다.

요건을 갖춰 청구하면 심리는 열린다.

유럽의 '-68%'는 독립한 심판부가 만든 숫자

유럽특허청(EPO) 심판부에서 24개월 넘게 묵은 사건은 2024년 말 729건에서 2025년 말 234건으로 68% 줄었다.

전체 계류 사건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21.5%에서 10.5%로 내려왔다.

미국의 68%가 '덜 열어서' 나온 숫자라면, 유럽의 68%는 '밀린 걸 치워서' 나온 숫자다.

그 밑에는 심판부의 성격이 있다.

EPO 심판부는 유럽특허협약(EPC)에 따라 특허청 안에 있으되 사실상 사법적 항소심 역할을 하는 기구다.

등록 뒤 9개월 안에 누구나 이의신청을 내면 1심 부서가 판단하고, 그 결과에 불복하면 심판부가 다시 본다. 2016년 규정 개정으로 심판부는 별도 조직으로 떼어져 청사까지 옮겨 독립성을 강화했고, 2020년 새 심판절차규칙으로 새 주장·증거를 뒤늦게 꺼내지 못하게 조여 사건을 빨리 끝내도록 바꿨다.

적체가 줄어든 건 그 설계가 몇 해에 걸쳐 작동한 결과다.

화상심리도 토대의 일부다. 2021년 규칙 15a조로 심판부는 재량껏 구술심리를 화상으로 열 수 있게 됐고, 1심 이의·심사 구술심리는 2023년부터 화상이 기본값이 됐다.

포럼 자료는 2025년 구술심리의 62%가 화상으로 진행됐다고 소개했는데, 이 수치는 본지가 1차 자료로 확인하지 못해 발표자료 기준임을 밝혀 둔다.

다만 확대 흐름 자체는 분명하다. 2023년 문을 연 통합특허법원(UPC)은 침해·무효를 다루는 별도 국제법원으로, EPO 심판부와는 계통이 다르다.

중국의 심판 폭증은 '선출원'이라는 토양에서 자란다

포럼은 중국 국가지식재산국(CNIPA)의 상표무효심판 심결이 2021년 5만7,800건에서 2025년 7만5,333건으로 약 30% 늘었다는 수치를 발표자료에 담았다.

다만 CNIPA가 공개하는 상표 심판 통계는 거절불복·이의재심·무효를 한데 묶어 연간 수십만 건 단위로 집계돼, 이 두 숫자가 어느 범주를 가리키는지는 본지가 1차 자료로 특정하지 못했다.

여기서는 발표자료 기준으로만 적어 둔다.

검증되는 건 그 숫자가 자라는 토양이다.

중국은 쓰든 안 쓰든 먼저 낸 사람이 권리를 갖는 선출원주의 나라다.

유효 등록상표가 2025년 말 약 4,988만 건으로 세계에서 압도적으로 많고, 그만큼 남의 상표를 미리 선점해 두는 '악의적 출원'이 끊이지 않는다.

심판이 몰리는 이유다.

중국은 2019년 상표법을 고쳐 '사용할 뜻 없이 낸 악의 출원'을 심사 단계에서 거절할 근거를 만들었고, 같은 해 심판 기구(TRAB)를 CNIPA 상표국으로 통합했다.

분쟁이 폭증하는 토대 위에서 제도는 계속 손질되는 중이다.

정비는 지금도 진행형이다.

중국은 2026년 6월 상표법 5차 개정을 통과시켜 2027년 1월 시행을 예고한 것으로 전해진다.

사용 의사 없이 통상적 영업 범위를 넘어 무더기로 낸 출원을 거르고, 악의 출원에 과태료를 물리는 내용이 담겼다.

중국 시장에 진출한 우리 기업으로서는, 선점당한 상표를 되찾는 무효심판이 앞으로도 주요 전장이라는 뜻이다.

일본은 사람이 만들지 않은 디자인은 지키지 않는다

일본은 두 번째 분과에서 디자인의 유사 판단과 인공지능(AI) 생성 디자인을 다뤘다.

일본의 디자인 보호는 2019년 개정 의장법(2020년 4월 시행)이 토대다.

이 개정으로 화면 디자인(GUI)과 건축물·실내 공간이 보호 대상에 들어왔고, 권리 기간은 '등록 뒤 20년'에서 '출원일부터 25년'으로 늘었다.

유사 여부는 수요자가 눈으로 받는 미감을 기준으로, 물품과 형태를 함께 따져 판단한다.

등록된 디자인을 깨려면 이해관계인이 무효심판을 내 구술심리로 다투는 길밖에 없다.

눈길을 끈 건 AI다.

일본 특허청은 저작권법과 의장법은 '사람의 창작'을 전제로 한 법이어서 사람의 창작적 기여가 없는 AI 생성물은 보호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2025년 초 소위원회 자료에서 밝혔고, 같은 해 3월 관련 조사연구 보고서를 냈다.

가상공간 전용 디자인을 어디까지 보호할지는 아직 심의 중이다.

토대가 '사람이 만든 것'에 있는 만큼, AI 디자인의 자리는 그 토대를 다시 건드려야 열린다.

한국은 '처'로 올라섰고, 여름엔 화면으로 심리를 열었다

그렇다면 한국의 토대는 어떤가.

특허청은 2025년 10월 1일 국무총리 소속 지식재산처로 승격했다.

초대 처장은 김용선 전 특허청 차장이 맡았고, 조직에는 지식재산분쟁대응국이 새로 생겼다.

심판은 특허심판원이 1차로 판단하고, 불복하면 특허법원, 다시 대법원으로 간다.

행정 심판 뒤에 독립한 전문 법원의 3심 사법 심사가 받치는 구조다.

미국처럼 '심리를 열지'를 고르는 재량은 없는 대신, 법원 단계의 독립성은 단단한 편이다.

규모의 토대는 다르다.

지난해 심판 청구는 7,352건으로 전년보다 10.8% 줄었고, 평균 처리기간은 특허·실용신안 6.3개월, 디자인·상표 8.1개월이었다.

미국이 2년 새 청구가 반 토막 나고 유럽이 적체를 치우는 사이, 한국의 청구량은 완만히 줄어드는 정도다.

처리 속도를 더 끌어올리려 지식재산처는 AI·첨단바이오 초고속심사를 넓히고, 올 7월부터는 공개 사건에 한해 집이나 사무실에서 접속하는 인터넷 영상 구술심리를 본격 도입했다.

유럽이 몇 해에 걸쳐 걸어온 화상심리의 길을 한국도 들어선 셈이다.

이번 포럼의 명분도 거기에 있다.

신기술과 국제 분쟁 환경의 변화 속에서 주요국의 경험을 모아, 한국 기업의 권리 보호와 심판제도의 방향을 함께 찾자는 것이다.

숫자를 들여오는 자리가 아니라, 숫자 아래 토대를 견주는 자리였던 셈이다.

포럼은 끝났고, 물음은 남았다

종합토론은 '지식재산 심판의 발전 방향과 향후 과제'를 주제로, 심판의 전문성과 신속성을 높이고 권리의 안정성·예측가능성을 확보하는 방안을 다뤘다.

김기범 특허심판원장은 “기술 발전과 국제 지식재산 환경의 변화에 따라 심판제도의 전문성과 신뢰성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며 “이번 공개 토론회가 주요국의 경험을 공유하고, 우리 기업의 지식재산권 보호와 공정하고 신속한 심판제도의 발전 방향을 함께 모색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포럼은 하루 만에 끝났지만, 답해야 할 물음은 남는다.

미국식 개시 재량처럼 심판의 문턱을 정부가 조절하는 장치를 한국도 들일 것인가, 아니면 요건만 갖추면 열리는 지금 구조를 지킬 것인가.

사람이 만들지 않은 AI 디자인과 창작물을 한국 제도는 어디까지 품을 것인가.

그리고 7월에 연 영상 구술심리는 비공개 사건으로도 넓어질 것인가.

토대가 다른 나라의 숫자를 참고하되 그대로 옮기지는 않는 일 — 그 분별이 다음 과제다.

취재에 참고한 자료

지식재산처 보도자료 '주요 5개국 지식재산 심판제도 변화 한자리에'(2026-11-6)와 미국 특허청(USPTO) 특허심판원 심판통계(2026 회계연도), 2025년 재량 거부 관련 절차 안내 및 입법예고 자료, 유럽특허청(EPO) 심판부 연차보고서 2025, 유럽특허청 심판절차규칙 15a조 및 확대심판부 G1/21 결정, 중국 국가지식재산국(CNIPA)의 2025년 지식재산 통계(2026-1-23 발표)와 2019년·2026년 상표법 개정 자료, 일본 특허청(JPO) 2019년 개정 의장법 및 AI 생성 디자인 관련 심의자료(2025), 한국 지식재산처·특허심판원의 조직 개편과 영상 구술심리 도입 자료를 확인했다.

나라마다 심판의 집계 단위가 달라 — 미국은 '청구·개시', 유럽은 '계류 적체', 중국은 '심결 건수', 한국은 '처리기간' — 수치를 한 줄에 놓고 단순 비교하기는 어렵다.

특히 포럼이 제시한 중국 상표무효 심결 수치는 CNIPA 공개 집계의 범주와 정확히 들어맞는지 1차 자료로 확인하지 못해 발표자료 기준으로만 적었다.

편집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