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곡리고인돌 (경기도 제공)



[PEDIEN] 평화누리길은 경기도 DMZ 접경 지역 4개 시군을 잇는 최북단 도보 여행길이다. DMZ 인근 철책선을 따라 걸으면서 분단 현실을 체감하는 것은 물론 뛰어난 자연경관과 역사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길로도 유명하다. 2010년 개장한 평화누리길은 총 12개 코스로 전체 길이는 약 189km이다. 김포 3코스, 고양 2코스, 파주 4코스, 연천 3코스로 구성돼 있다.

DMZ와 인접한 평화누리길은 사계절의 특징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가을을 맞아 경기도는 계절별 색깔을 천천히 음미하도록‘DMZ 사색하다’라는 주제로 평화누리길 10코스를 소개한다.

평화누리길 10코스는 연천군 장남면과 임진강 일원을 따라 이어지는 ‘고랑포길’ 이다. 강과 포구, 왕릉과 유적을 중심으로 걷노라면 불과 100여 년 전부터 고려, 삼국시대를 거슬러 올라 선사시대까지 우리 조상들의 흔적을 한 길에서 만날 수 있다.

출발점은 장남교인데 이곳부터 예사롭지 않다. 2008년 재가설 공사 당시 주먹도끼 등 구석기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이는 임진강 일대가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의 중요한 삶의 터전이었음을 보여주는 흔적이다.

강 주변과 들녘을 지나면 사미천으로 들어선다.‘후크고지 전투’라는, 한국전쟁 당시 UN군과 중공군이 강을 두고 치열한 공방을 벌이던 곳으로 이 일대를 사수함으로써 임진강을 지킬 수 있는 계기가 됐다고 한다. 새삼 소중하게 다가오는 임진강을 마주하며 걷다 보면 노곡리 마을에 들어서는데 늦가을에 이 길을 걸으면 갈대밭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 노곡리라는 마을 이름도 갈대가 무성하게 우거져 있다는 데서 유래한다.

노곡리를 지나 학곡리에 들어서면 역사의 시간은 청동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을 한가운데에 거대한 고인돌이 자리하고 있어서이다. 당시 고인돌은 경제력이나 정치권력을 가진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는데, 학곡리 고인돌은 길이 2.7m의 현무암 덮개돌이 특히 눈길을 끈다.

여기서 10분 남짓 걸으면 백제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적석총을 만난다. 두 유적을 차례로 마주하다 보면 임진강을 터전으로 살아갔던 옛사람들의 삶과 권력의 흔적을 자연스럽게 상상하게 된다.

종점을 향해 길을 걷다 보면 고려왕조를 기리는 숭의전을 만나게 된다.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고려의 왕과 공신의 제사를 지내며 기렸던 종묘이다. 제향 공간 특유의 단정한 구성과 고요함이 9월의 계절감과 잘 어울린다. 숭의전지에 이르면 평화누리길 10코스는 마무리되는데, 다시 출발점인 장남교로 돌아가 꼭 소개하고 싶은 지점이 있다.

장남교에서 약 5km 가량 이동하면 임진강의 중심 교역지였던 고랑포구가 자리잡고 있다. 1930년대 화신백화점 분점이 들어섰을 정도로 생활과 물류의 중심지였으나, 치열했던 한국전쟁 이후 포구의 기능은 사라지고 유유히 흐르는 강물 소리만이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해준다. 대신, 고랑포구 역사공원을 방문하면 당시 북적였던 고랑포구의 모습이 생생하게 재현되어 있다.

고랑포구 뒤로 나지막한 구릉을 오르면 신라의 마지막 왕이었던 경순왕릉을 만날 수 있다. 천년왕국을 고려로 넘겨야 했던 비운의 군주, 경순왕릉은 신라왕릉 중 유일하게 경주가 아닌 경기도 연천에 자리하고 있다. 고려왕조 초기 ‘왕릉은 수도 개경에서 백 리 안에 있어야 한다’라는 원칙을 명분으로 통제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경순왕릉은 세월이 흐르며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 유적의 위치조차 알 수 없게 되었는데, 조선 영조 23년, 주변에서 ‘신라경순왕지능’이라고 적힌 비석이 우연히 발굴되면서 세상에 다시 알릴 수가 있었다. 그 후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등 격동의 근대사 속에 또다시 방치되었던 경순왕릉은 민통선 지역을 시찰하던 육군 대위에게 우연히 발견되면서 현재의 왕릉으로 복원될 수 있었다. 고향을 바라보며 사무친 그리움에 편히 잠들지 못했을 경순왕은 고단했던 역사를 후손들과 함께 감내하다 이제야 비로소 편안한 영면을 취하지 않았을까.

고랑포구에서 이동하면 고구려가 영토를 확장했던 대표적인 유적인 호로고루에 닿는다. 현무암으로 쌓은 이 성벽 위에 서면 임진강 주변이 한눈에 들어오는 천혜의 요새다. 강을 끼고 자연을 방어선으로 삼았던 전성기 고구려인들의 기상을 느낄 수 있다. 한편 이곳 호로고루에서는 9월 3일부터 6일까지 해바라기와 코스모스가 가득한 통일바라기 축제가 열린다.

고랑포길은 과거 임진강의 물류 중심지로 번화와 명성이 자자했던 길이었다. 지금은 분단의 상처와 함께 그 기억만을 간직하고 있으나 역사의 흔적은 찬란했던 시절을 증명하고 있다. 구석기인의 주먹도끼에서 고구려 성벽과 신라 마지막 왕의 능, 고려 왕조를 기리는 숭의전, 번성했던 근대의 포구와 후크고지 전투의 승전보까지 수천 년의 역사가 한 길 위에 겹겹이 쌓여 있다.